하루는 오프닝 시퀀스 없이 시작된다.요란한 배경음악도 없고, 멋진 크레딧도 없이 하루가 시작된다.
눈이 반쯤 감긴 채 핸드폰 알람을 끄고,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적신다. 커튼을 걷는 순간 창밖의 햇살이 렌즈 플레어처럼 내 방 안으로 들어오고, 그제야 정신이 조금씩 맑아진다.
이 장면을 누가 찍는 것도 아닌데, 나는 종종 상상한다.
‘지금 카메라가 있다면, 어떤 구도로 찍힐까?’
‘음악은 어떤 게 어울릴까? 포크? 아니면 재즈?’
아무도 보지 않지만, 나는 매일의 시작을 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처럼 느끼려 한다.
그렇게 마음가짐 하나로 평범한 하루가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1. 소리 없는 대사들, 일상의 클로즈업
이야기가 없는 하루라고 생각했던 날에도
누군가와 나눈 짧은 눈맞춤,
카페에서 들은 옆 테이블의 대화,
버스 창밖을 보며 떠오른 오래된 기억들은
내 영화의 ‘무성 대사’처럼 스쳐 지나간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어제 저녁.
편의점 앞에서 라면을 먹는 청년의 손이 너무 떨려 보여
왠지 모르게 마음이 묘해졌다.
그 순간, 나는 속으로 혼잣말했다.
“카메라는 그의 손을 클로즈업한다.
젓가락을 쥔 손가락, 묘하게 흔들리는 스프 봉지.”
누군가에겐 사소하고 하찮은 순간이지만,
이런 장면들이 오히려 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내 영화는 이런 조용한 장면들로 채워져 있다.
2. 배경음악은 귀에 들리지 않는다
하루 중 문득 ‘지금 BGM이 깔린다면 어떨까?’ 싶은 순간이 있다.
사무실에서 혼자 남아있는 야근 시간,
비 오는 날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이어폰 없이 멍하니 앉아 있는 그 시간.
나는 그런 순간에 내 마음 속 음악을 튼다.
이루마의 피아노곡이 흐를 때도 있고,
어느 날은 영화 _Her_의 사운드트랙이 흐르기도 한다.
음악은 내 기분에 따라 달라지고,
때론 음악이 먼저 흐른 뒤에 감정이 따라오기도 한다.
이건 내 감정의 편집실.
삶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적절한 사운드트랙을 깔며 다시 살펴보는 것.
내겐 그것만으로도 하루가 영화처럼 느껴진다.
3. 엔딩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온다
대부분의 영화는 엔딩이 가까워질수록 음악이 서서히 흐르고, 조명이 낮아지고, 감정이 고조된다.
하지만 우리의 하루는 그렇지 않다.
내 하루의 마지막 장면은 대개 무너진 자세로 핸드폰을 보다가 졸린 눈으로 불 끄고 누운 순간이다.
그런데 가끔은 아주 조용한 클로징이 찾아올 때가 있다.
창문을 타고 들어온 바람이 커튼을 살짝 흔들고,
그 틈으로 보이는 달빛이 방 안을 적실 때.
혹은 누군가의 톡 한 줄,
"오늘 고마웠어."라는 짧은 메시지에 내 마음이 묘하게 정리될 때.
그럴 땐 생각한다.
“아, 오늘 이 장면으로 끝나는구나.
조명 꺼졌고, 음악도 페이드아웃.”
이런 순간들이 쌓여 내 인생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완성하고 있다.
지루하다고 느껴지는 하루 속에도,
사실은 스태프 롤이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에필로그, 매일을 기록하는 이유
나는 아직도 내 인생의 장르가 뭔지 모른다.
로맨스일까, 성장영화일까, 아니면 다큐멘터리?
그럼에도 확실한 건,
내가 지금도 찍히고 있다는 상상만으로
더 의식 있게 살아가게 된다는 것.
카메라는 멈추지 않았고,
나는 매일 그 안에서 배우처럼 살아간다.
아마 언젠가 누군가에게
“그 장면, 좋았어요”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그때 비로소 나는
‘내 영화, 잘 찍고 있었구나’ 하고 웃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