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낯선 곳에서 설레지만, 익숙한 곳에서 위로받는다.
매일 지나치던 골목,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강아지,
빵 굽는 냄새가 새어나오는 작은 가게까지—
별거 아닌 듯 보였던 이 동네 풍경들이
어느 날 문득, 너무 소중하게 다가왔다.
‘여기가 나의 하루가 자라는 곳이구나’ 싶어졌다.
이 글은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마주한 사소하지만 찬란한 풍경들을
마음으로 찍어낸 기록이다.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도,
나에겐 이 풍경 하나하나가 '일상 속의 기적'이다.
그 따뜻하고 조용한 순간들을
살며시 꺼내어, 여기 담아본다.
1.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편의점 뒷골목
우리 집 근처엔 오래된 편의점이 하나 있다.
24시간 문을 여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늘 믿음직스럽다.
특히 그 뒷골목은 나만의 비밀 통로처럼 느껴지는 곳.
비 오는 날이면 빗물이 고여 반사된 하늘이 예쁘고,
눈 오는 날엔 누구보다 먼저 발자국을 남기고 싶어진다.
그 길 끝 벽에 붙은 오래된 포스터 하나,
예전엔 몰랐는데 지금은 없으면 허전하다.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그 골목에서
나는 자주 멈춰 선다.
그냥, 괜히.
그런 게 있다. 아무 이유 없이 마음이 끌리는 장소.
그곳은 꼭 대단한 풍경이 아니어도,
나만의 마음 풍경이 된다.
2. 매주 금요일, 빵 굽는 냄새가 나는 거리
금요일 아침,
아직 다 열리지 않은 가게들이 조용히 하루를 준비하는 시간.
그 중 하나, 작은 동네 빵집 앞을 지나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냄새가 난다.
딱 그 시간에만 나는 그 냄새는
단순히 빵 냄새가 아니라
‘이번 주도 잘 버텼구나’라는 위로처럼 느껴진다.
그곳의 사장님은 매번 같은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달달하게 굽고 있어요.”
그 말 한마디에 마음이 풀어지는 날이 있었다.
빵 하나 사 들고 돌아오는 길,
내 발걸음이 가벼워진 걸 느꼈다.
작은 거리 하나가 나를 다독이는 그 느낌,
나는 그걸 매주 기다린다.
3. 낮잠 자는 강아지와 나를 알아보는 이웃들
이 동네엔 이름 모를 강아지가 있다.
작은 식당 앞에서 늘 졸고 있다.
가게 주인 아저씨가 ‘복실이’라고 부른다지만
사실 다들 제각각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나는 ‘잠꾸러기’라고 부른다. 늘 자고 있어서.
아침에 인사하면 꼬리만 흔들고,
저녁엔 모른 척 눈을 감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
'저 아이가 오늘도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하루의 균형을 잡아주는 기분이다.
그리고 이 동네엔
내 이름을 몰라도 얼굴은 아는 사람들이 있다.
같은 시간대에 같은 길을 걷는 이웃들과
눈빛으로 안부를 나누는 그 관계.
묘하게 편안하다.
사소한 풍경 속의 사람들과 동물,
그 조용한 연결이
‘사는 맛’이 되기도 한다.
골목 어귀에 핀 꽃은 늘 이름을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피어 있고, 어느 날 조용히 사라진다.
봄이면 분홍빛, 여름이면 초록, 가을엔 노란빛이 퍼지고,
겨울엔 가지 끝 눈송이가 조용히 계절을 알려준다.
이름도 없이, 주목도 받지 않지만
그 자리에 가면 늘 있던 작은 들꽃 하나.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동네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기분이 든다.
작은 텃밭을 가꾸는 할머니는 매 계절 뭔가를 심고,
나는 그걸 보고 계절을 읽는다.
고추에서 호박으로, 호박에서 국화로.
계절은 그렇게 사는 사람들의 손끝에서 자란다.
가끔은 이 동네 전체가
‘시간을 천천히 사는 법’을 알려주는 스승처럼 느껴진다.
빠르게 지나가는 도시의 시간과 달리
여긴 계절의 속도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거창한 풍경은 없지만,
나는 이 동네가 좋다.
그저 익숙한 하루하루가 쌓여
소중한 나의 공간이 되었으니까.
내일도 이 풍경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고마워지는 밤이다.
당신의 동네엔 어떤 사소한 풍경이 있나요?
혹시, 나만 아는 골목이나 매주 기다려지는 작은 냄새가 있다면
그건 이미 당신만의 보물일지도 몰라요.